상식

2008년 세계정치의 트렌드 변화(보수 → 중도화, 색깔 지우기, 진보)

천화대 2008. 11. 5. 12:08

#1

큰 트렌드를 읽으면 미래가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 안목은 리스크를 줄여주고, 기업과 개인의 생산성과 운신의 폭을 넓여준다. 약간은 당황스럽고, 약간은 낯설은 '배럭 오바마'의 성공스토리를 그런 큰 '트렌드' 차원에서 보자.

 

배럭 오바마의 당선을 단순히 비주류 흑인정치인의 성공스토리로 보면 곤란하다. 오바마 당선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근 20년만에 가장 '민주당'스러운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시사점을 주는 문제다.

 

#2

90년대 이후 세계 정치의 트렌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중도화', '색깔 지우기'였다. 이런 중도화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유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이다. 그가 주창한 '제 3의 길'은 당시 전통적 정당체제에 익숙한 많은 정치인들과 전문가 집단에 깊은 영감을 주었고, 이 제 3의 길을 충실히 이행한 정치인들은, '대박'을 터뜨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토니 블레어, 미국의 빌 클린턴, 한국의 김대중 같은 이들이다.

 

90년대,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은 보수당 뺨치는 보수정책으로 중도적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이런 토니 블레어를 이기기 위해 오늘날 보수당은 '데이비드 캐머론'이라는 사십대의 꽃미남을 당대표로 삼고, 노동당만큼이나 노동친화적인 정책들을 쏟아놓았다.

 

미국은 어떤가. 레이건 이후 공화당 일색이던 미국 정치계에 빌 클린턴은 매우 자유분방하고 금융자본에 친화적인 면모를 보이며, 전통적 민주당의 색깔을 탈색시키는 방법으로 위기에 처한 미국 민주당을 집권시키는데 성공했다.

 

멀리 볼 것 없이, 한국의 경우 역시 김대중과 같은 야당 정치인은 종래의 진보적 색채를 빼고, 자유주의적 정강정책으로 보수층을 안심시키는 방식으로 집권에 성공하였다.(과거 앤서니 기든스가 김대중을 굉장히 예찬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과거의 김대중은 '대중경제학'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급진적인 경제철학을 갖고 있었다.)

90년대는 이렇게 중도화, 제 3의 길, 자기 색깔 지우기의 전략이 먹히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성공스토리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진보'는 그렇게 '가늘게' 살아남았다.

 

#3

하지만 전세계적인 금융불안 속에 신자유주의가 파국을 맞이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고 있다. '시장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반성들이 일상화되면서, 클린턴과 블레어 방식의 '자유주의적 진보'는 해답을 잃은 듯하다. 국가의 적극적 개입은, 오히려 경제 왜곡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전통적 케인즈주의의 믿음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그 결정적 결과물이 바로 오바마의 집권이다. (여러 면에서 오바마는 대단한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최악으로 치닫던 영국 노동당의 인기가 다시 보수당에 근접하고 있다는 소식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은 눈앞에 다가온 총선에서 사민당의 부활 분위기에 잔뜩 긴장한 눈치다. 스페인, 브라질, 호주 모두 노동당은 보수당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이 모두가 10년전에는 상상도 못한 큰 변화의 풍경이다. 우리는 지금 매우 강력한 세계정치의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이다.

 

#4

오바마는 민주당 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한 급진적인 인물이 대국 미국의 최고 통수권자가 될 만큼, 전세계의 정치적 트렌드는 '진보', '선명성'으로 수렴되고 있다. 안타깝겠지만, 세계의 전통적 보수 정당들은 여러모로 우호적이지 않은 여건에 놓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향후 경제시스템이 또다른 격변을 겪지 않는 이상, 이러한 트렌드는 아주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흐름이 될 공산이 크다. 이러한 국제 사회의 변화된 모습은 한국의 민주당과 같은 진보색채를 갖는 전통 정당들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한국의 민주당 역시 미국이나 유럽 각국의 경우를 반면교사 삼아, '선명성' 경쟁으로 살 길을 찾아야 할 듯 싶다. 배럭 오바마의 승리처럼, 자기 정체성에 충실한 색깔의 정치인이 보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여건이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